끝내 최고점을 찍었다. 지난 4월 열 번째 미니앨범 [FML]로 돌아온 세븐틴 (SEVENTEEN)이 발매 첫 주에 455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상 처음으로 초동 400만 장 선을 돌파했다. 직전 [Face the Sun]의 206만 장과 비교해 봐도 폭발적인 성장이다.
작금의 K팝 보이그룹은 이렇게 팬덤의 사랑 아래 각자의 영역을 굳건히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연간 차트처럼 시대 흐름을 되짚는 결정적 순간엔 몇몇을 제외하고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다. 음악 자체를 팬덤 중심으로, 그것도 단발적으로 집중 소비하니 절대적 수치와 대중적 인기가 비례할 수 없었다.
이는 곧 보이그룹 전체에 묘한 위기의식을 심었다. 소수에게만 허락된 성공 신화, 보이그룹의 대중적 고립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최근 곳곳에서 감지된 탈피의 움직임이 K팝 보이그룹 신을 꿈틀거리게 만들고 있다.
새로운 에너지를 맞닥뜨리기 전에 기존 현상에 대한 고찰은 필수적이다. 유튜브를 중심으로 영상 미디어가 격변을 맞이했던 2010년대부터 한국 음악은 조금씩 글로벌 시장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됐고, 이미 보는 음악에 특화되어 있던 K팝은 퍼포먼스를 더욱 앞세워 나갔다. 기본 체격 면에서 힘과 기술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보이그룹에겐 분명 호재로 작용했다. 난도 높은 동작을 안무에 접목한 방탄소년단이나 다인원 그룹의 장점을 최대로 활용한 세븐틴 (SEVENTEEN)이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 주목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형 기획사 아이돌의 가시적 흥행 사례를 경험한 이후로 무대 위의 경쟁은 점점 과열되었다. 외적 요소를 보다 강렬히 드러내려는 트랙은 대체로 웅장하고 무거운 비트를 선호하기 시작했고 콘셉트 역시 어두운 분위기를 드리웠다. 비교적 위험 부담이 적은 방향이었다고 하나 공동의 레퍼런스 공유는 그룹 간 차별점의 부재, 나아가 음악적 핵심인 멜로디의 상실로 이어졌다. 음악과 퍼포먼스의 주객전도가 결국 그들 스스로를 드넓은 음지로 끌고 간 것이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피지컬을 강조했던 과거는 접어두고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로 굳은 결의를 내비친 H1-KEY (하이키)부터 빌보드 메인 차트에 입성하며 중소 아이돌의 기적으로 부상한 FIFTY FIFTY까지. 올해 초부터 소규모 자본 신인 걸그룹이 쏘아 올린 승전보 덕분에 ‘듣는 음악’의 힘을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고, 업계 또한 고착된 접근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본질적 회복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선순환에 힘입어 보이그룹 진영도 반격에 나설 채비를 마쳤다. 눈에 띄는 개선을 꼽자면 강하게 고막을 밀어붙이던 음압이 유해졌다. 다시 말해 담백한 사운드나 뚜렷한 멜로디로 편안한 청취를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5월 30일 정식 데뷔를 앞둔 6인조 보이그룹 BOYNEXTDOOR에게 지난해 미니멀 광풍을 일으킨 걸그룹 NewJeans의 행보가 스친다. 소속사 KOZ 엔터테인먼트의 수장 지코 (ZICO)와 유명 작곡가 Pop Time이 제작을 주도한 팀은 싱글 앨범 [WHO!] 발매 일주일 전부터 여러 편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 인위적인 질감의 세트보다 집, 길거리, 백화점과 같은 일상 공간에 머무른 여섯 소년은 풋풋한 고백이 담긴 하이틴 스토리를 선사하며 이름에 걸맞은 친근함을 배가한다.
특히 23일 자정에 첫선을 보인 ‘돌아버리겠다’는 음악적으로 완벽히 트렌드에 녹아든다. 통통거리는 베이스와 기타 리프 위의 보컬은 절친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노랫말로 설레는 감정을 재치 있게 풀어냈고, 단번에 따라 부르기 쉬운 운율과 후렴구를 들여와 너른 팬층을 공략한다. ‘아무노래’로 챌린지 열풍을 몰고 왔던 두 프로듀서의 작품답게 맹렬히 대중성을 내비친 싱글은 차세대 보이그룹의 음악적 표본으로 제시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얼마 전 발매된 IST 엔터테인먼트 보이그룹 ATBO의 세 번째 미니앨범 [The Beginning : 飛上]에도 고심의 흔적이 역력하다. 2022년 자체 서바이벌 오디션을 진행해 결성한 ATBO는 인지도 면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지만 그간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두 번의 활동 모두 앞서 언급했던 퍼포먼스 트랙의 고질적 약점을 고스란히 떠안으며 독자적인 매력 구축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번 ‘Next to Me’는 확연히 다르다. 기타 리프와 브라스 세션을 산뜻하게 조율한 곡은 또박또박 내뱉는 랩과 가창을 도드라지게 만들며 다음 단계로의 비상을 꿈꾸는 소년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묵직한 베이스로 퍼포먼스에 중점을 둔 ‘BOUNCE’를 신보의 타이틀곡으로 선정하지 않은 전략적 한 방이 ATBO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묘수가 되어 돌아왔다.
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일본에서 열린 〈KCON JAPAN 2023〉은 〈KCON〉 개최 이래 최다 관객인 12만여 명을 끌어모았다. 성황리에 마무리된 행사에서 화제의 중심에 선 팀은 서바이벌 오디션 〈BOYS PLANET〉을 통해 멤버를 확정 지은 ZEROBASEONE이다. 첫 완전체 무대를 향한 기대로 가득 찬 K팝 팬들은 공연장을 가득 채웠고, 대표곡 ‘난 빛나 (Here I Am)’를 다 함께 따라 부르며 각별한 관심을 표했다.
정식 데뷔 전임에도 끈끈한 결속을 다지는 건 방영 전부터 강조한 연대의 메시지다. 흔히 4세대 아이돌로 불리는 팀은 대부분 당당한 나 자신에 초점을 맞췄지만, 5세대 보이그룹 기획을 자처한 프로그램은 너와 내가 함께하는 우리로 무게추를 옮겼다. 시리즈 최초로 선보인 시그널 송의 페어 안무, 그래픽 디자인 대신 두 청년의 실물 사진을 활용한 앨범 커버가 이에 대한 방증이다.
최종회에서 공개한 그룹명 또한 그들의 주장에 힘을 보탠다. “0에서 1로 향하는 자유로운 여정. 그리고, 찬란한 시작.” 미숙한 상태로 출발해 완성을 향해가는 ZEROBASEONE은 앞으로의 성장 서사를 팬들과 함께 채워 가겠다고 다짐한다. 이전에도 존재해 왔던 평범한 문구지만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멀어진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다시 이어보자는 의지로 다가온다.
일본에서 K팝 현지화를 시도한 다국적 보이그룹 &TEAM도 흡사한 캐치프레이즈를 제안한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호 ‘&’을 들여온 이들은 인간을 포함한 세상 전부와 고리를 맺어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성장하길 바란다. 같은 모기업인 하이브 소속의 ENHYPEN과 작명 방식은 물론 세계관까지 공유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TEAM의 음악은 희망찬 워딩으로 국경, 언어, 문화를 가리지 않는 다각적 팬 유입을 유도하고 있다.
앞서 다룬 ZEROBASEONE은 K팝 그룹 중 최단기간에 SNS 100만 팔로워를 보유하며 범대중적 유행을 예고한 바 있다. 공식 출범 전에 충성 고객을 확보하는 것은 K팝이 태동하던 시기부터 일찍이 제기되어 온 방법론이다. 다만 미디어 시장이 다변화를 겪으며 적은 자본금으로도 소기의 마케팅 성과를 올릴 수 있다는 점이 주요한 포인트다.
BOM(Boys of MNH)이란 별칭으로 4개월 동안 유튜브 구독자 42만 명, 틱톡 팔로워 40만 명을 끌어모은 MNH 엔터테인먼트의 보이그룹 8TURN이 대표적인 예다. 먼저 이목을 잡아 끈 건 퍼포먼스 커버나 댄스 워크샵 영상이었지만, 시청자의 알고리즘을 붙잡는 콘텐츠는 수수한 차림새로 촬영한 일상 속 에피소드 〈BOM UP〉이었다. 연습생의 현실적인 모습과 고민을 담은 영상은 하나의 팀으로 합을 맞춰가는 과정에 팬들을 동화시켰고 그들과 속 깊은 유대를 뿌리내리며 향후 행보에 대한 믿음까지 다졌다.
다가오는 6월 출격을 앞둔 판타지오 소속의 LUN8 역시 유튜브를 중심으로 팬들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그룹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아이덴티티 필름으로는 색에 맞게 스며든 아이돌을 만나볼 수 있다면, 가방 속 물건을 소개하는 〈What’s in my bag?〉이나 리얼리티 예능 〈Real! LUN8〉에선 본연의 자신을 투영해 인간적 매력을 부각하기도 했다.
영상 대신 음악이 전면에 나서기도 한다. 중화권 대형기획사 원쿨잭소 엔터테인먼트는 지난해 5월부터 OCJ Newbies라는 이름으로 연습생들을 소셜 미디어에 공개했고, 그중 9명을 모아 올해 3월 신인 보이그룹 XODIAC을 본격적으로 선보였다. 이들은 주어진 곡과 스타일에 따라 참여 인원을 조정하는 유닛형 그룹을 표방한다. 무한 확장을 선도하는 걸그룹 tripleS (트리플에스)가 양질의 음악으로 기대에 부응했듯, XODIAC 또한 주어진 조건 내에서 소비자의 음악적 만족에 몰두하며 정형화된 제작 방식을 비트는 데 일조했다.
저조한 출산율과는 별개로 재능 있는 한국인 남자 연습생을 발굴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불가피한 현실이다. 팬덤 지향형 마케팅이 진입장벽을 세운 탓에 시대를 뒤이어 갈 후배 인재의 유입이 현저히 줄었다. 천만다행인 건 자본의 크기와 상관 없이 많은 걸그룹이 대중의 영역인 가요 차트를 돌아가며 지배하고 있고, 그 압도적 기세 덕분에 보이그룹 신에 성찰과 쇄신의 바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늦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세대교체를 이뤄낼 절호의 기회. 한 번쯤 가슴 한편에 모셔 두었던 그 시절 우상에 대한 추억을, 어린아이들도 다시금 꿈꾸고, 즐기고, 간직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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