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코첼라가 다가올 2023년 페스티벌의 라인업을 공개했다. 늘 그랬듯 국적을 막론한 여러 스타의 이름이 리스트를 빼곡히 장식한 가운데 전 세계 매체와 음악 팬들이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은 바로 헤드라이너의 정체다. 사흘간 진행되는 행사의 시작과 끝을 맡은 것은 라틴 팝의 선두 주자로 차트에서 큰 활약을 펼치고 있는 배드 버니(Bad Bunny)와 얼터너티브 알앤비 장르의 독보적인 뮤지션으로 작업물마다 평단의 찬사를 끌어내는 프랭크 오션(Frank Ocean)이다. 그리고 이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또 한 명의 아티스트가 걸그룹 블랙핑크(BLACKPINK)다.
공식 명칭으로는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Coachella Valley Music and Arts Festival)’, 흔히 줄여 ‘코첼라’로 불린다. 1999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해 오늘날까지 성황리에 개최되어 온 세계 최고의 상징적이고 역사적인 음악 페스티벌 중 하나다. 25만 명을 수용할 만큼 압도감을 뿜어내는 광활한 대지 사이로 화려한 공연장과 각종 소규모 텐트가 수없이 놓이고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인종이 한데 모여들어 다양한 음악을 즐긴다. 이보다 짜릿한 경험이 있을까. 무릇 코첼라가 음악 마니아 사이에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장소’로 꼽히는 것은, 단순한 입버릇은 아닐 것이다.
지상 최대 규모의 페스티벌임에도 어느 한 곳에 쉽게 편향되지 않는다. 거대한 문화 용광로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각 지역의 트렌드를 빠르게 포착해 여러 수요층의 니즈를 모두 충족한다는 점이 코첼라의 핵심이다. 누구나 알 정도의 거물급 아티스트부터 숱한 잠재력으로 기대를 모은 신인은 물론, 주류 외곽에 위치한 인디 아티스트까지 모두 포용하는 과감한 스펙트럼의 라인업 구성이 대표적이다. 공연마다 준비한 형형색색의 무대 디자인과 디지털 아트, 아이디어를 촉발케 하는 각종 미학적인 설치물 역시 유명하다.
주류에 올라서기 전 과거의 K팝은 ‘팝’이 가진 보편성보다는 이를 수식하는 ‘K’의 특이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영국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Glastonbury Festival)의 초기 러브콜을 받은 아티스트는 국악을 소재로 한 4인조 앙상블 비아 트리오(Via Trio)와 독특한 콘셉트로 주목받았던 인디밴드 술탄 오브 더 디스코(Sultan of The Disco)다. 2017년 미국의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SXSW)에 참가한 아티스트는 실험적인 힙합 듀오 엑스엑스엑스(XXX)와 일렉트로니카 밴드 글렌체크(Glen Check)다. 코첼라 역시 2016년 힙합 팀 에픽하이(EPIK HIGH)를 기점으로 한국 뮤지션의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지만, 직후 초청 목록을 보면 2019년도 혁오(HYUKOH)와 잠비나이(JAMBINAI) 같은 국내외 평단과 마니아층의 관심을 얻은 인디 뮤지션에 중심이 쏠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같은 해 블랙핑크가 서브 헤드라이너로 초대되었을 때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공존한 것을 기억한다. 물론 K팝은 이미 세계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고, 록 위주였던 코첼라 역시 대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던 추세지만, 아이돌 그룹이 최초로 페스티벌 무대에 선다는 것에 대해 거리감을 내비치는 시각은 분명 존재했다. 동양의 대중음악이 단순히 외부의 시선에서 호기심의 대상이기 때문인지, 음악적인 면보다도 팬덤의 수익성을 고려한 선택은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블랙핑크의 코첼라 헤드라이너 선정 소식은 꽤 많은 변화를 시사하는 상징적인 모멘트다. 몇 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방탄소년단(BTS)에 의해 K팝이 빌보드 정상과 그래미 후보에 오른 것과는 별개로 페스티벌과 같은 라이브 중심의 플랫폼은 아직까지 까다로움이 앞선다. 음악을 소비하는 인구 중에서도 공연을 즐기는 이들의 지분은 꽤 작은 파이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동시에 잘 깨지지 않는 고정 수요층에 가깝다. 스트리밍은 언제든지 편하게 접할 수 있더라도 페스티벌은 직접 큰돈을 지불하고 두 발로 참여해야 한다. 즉, 헤드라이너의 요건에는 단순한 차트 성적과 인기라는 척도뿐 아니라 그 고정층의 찬성을 받아낼 만한 지속 가능하고 확실한 승부처가 수반되어야 하며, 군중이 공유할 수 있는 뚜렷한 히트곡과 무대 장악력 또한 필수적이다.
오늘날 K팝은 주류 팝 시장과의 원활한 교류를 거쳐 비단 한국이 아닌 세계로, 십 대만이 아닌 타 연령층을 모두 포용하는 방향으로 성장을 거쳐왔다. 페스티벌에 방문하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음악과 공연 문화에 관심이 많을 가능성은 높지만, 축제에 등장하는 모든 이의 음악을 알기는 힘들다. 블랙핑크의 경우 이 방면에서 그 여타 그룹보다도 적극적인 태세를 보여왔다. 현지화를 핵심으로 내건 [THE ALBUM](2020)과 [BORN PINK](2022)는 외국 작곡가를 투입하고, 팝스타와의 협업을 도모하며, 글로벌 수요를 위해 영어 가사를 중심으로 내세웠다. 지금의 블랙핑크 음악이 처음 듣는 곡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처음 들어보는 음악은 아닌 이유다.
2019년, 코첼라에서의 ‘뚜두뚜두 (DDU-DU DDU-DU)’ 라이브 퍼포먼스 영상은 현재 유튜브 조회수 4,800만을 기록하고 있다. 댓글은 무려 9만 개에 육박한다. 그 외에도 관련 영상 가운데 상위권에 ‘Kill This Love’와 ‘붐바야’가 위치한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코로나로 큰 타격을 입은 페스티벌 신은 유례없는 침체기를 맞이했고 그 여느 때보다 재도약이 중요한 시기다. 현재 음악계에서 그 누구보다 강력하고 다국적의 팬덤을 보유한 블랙핑크는 확실한 마케팅과 유입 파워를 보장하고 코첼라의 정체성이기도 한 문화 다양성에 설득력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다. 반대로 코첼라는 이들에게 전 세계 관중을 대상으로 한 양질의 무대와 라이브 송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누구도 손해 볼 것 없는 윈윈 전략이다.
3년 사이 블랙핑크는 메인 무대인 코첼라 스테이지로 승격해 빠른 성장세를 거두었다. 물론 한순간에 거둔 성과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속 K팝 플레이어 모두가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신뢰의 탑이 어느덧 확신으로 귀결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작년, 아시아계 음악인이 모여 결성한 음반사 88라이징(88rising)을 필두로 투애니원(2NE1)과 에스파(aespa)가 코첼라 무대에 올라서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방탄소년단의 제이홉은 롤라팔루자(Lollapalooza)의 메인 스테이지 라인업의 일원으로 참가해 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대상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였다. 스페인의 프리마베라 사운드(Primavera Sound) 페스티벌에서는 강렬한 메탈 사운드와 능숙한 군무는 물론 팬서비스로 훈훈한 미담까지 남긴 드림캐쳐(Dreamcatcher)가 여러 매체에 소개되어 존재감을 피력하는 데 성공했고, 올해는 레드벨벳(Red Velvet)이 이름을 올렸다.
K팝이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차트를 넘어 이제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 자리까지 ‘침투’하기 시작했다. 여러 기억이 장면처럼 스친다. 많은 관중의 함성과 연호 속 당당하게 걸어 나와 한국어로 무대를 펼치던 블랙핑크의 전사 같은 모습부터 비록 잠시나마였어도 씨엘(CL)의 주도하에 투애니원 완전체가 모여 ‘내가 제일 잘나가’를 부르던 감동적인 순간까지. 오랜 시간 가운데 수많은 변천사를 이룩한 K팝은 전성기의 팝만큼이나 어느덧 고유문화이자 흐름으로서 기능하고, 세계와 세대가 공유할 수 있는 뚜렷한 시대정신을 지니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다음 단계를 느긋하게 기약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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